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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방문자수: 333,594    2010년 09월 5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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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13릉(明十三陵)
08:30-17:30
입장료:60위안/인

명13릉(明十三陵)

다 볼 수 없기에 제대로 보는 것이 관건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명13릉(明十三陵)베이징 교외에서 60Km 떨어진 천수산 기슭에 위치하며, 명나라 16명의 황제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제 3대 영락제를 필두로 황제 13인과 황후 23인의 무덤 군으로, 함께 매장된 비빈과 궁녀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고 합니다. 또한 이 거대한 묘역 안에는 황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태자와 공주들의 묘도 함께 포함되어 있어 말 그대로 명나라의 황실 전용 묘역인 셈입니다.

명나라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1420년부터 명이 멸망하는 1644년 까지 약 220년간 조성된 무덤으로 역대 황제의 능묘군 중 가장 오랜 기간 건설된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무덤이 조성된 자리는 천수산을 주봉으로 동,서,남,북 삼면이 뭇 산들에 둘러쌓여 천연적인 대정원을 구성하며 정원 문은 남쪽에 있고, 그 양쪽에 용산과 호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마친 용과 범이 대문을 지키고 서 있는 듯 합니다. 남쪽은 넓은 분지이고 온유하가 서북에서 감돌아 흘러내리고 있는 등 황제가 안치된 자리인 만큼 풍수지리적으로 최고의 자리라고 합니다.
13릉의 유래는 정변과 관련이 있습니다. 명나라 첫 황제 주원장은 도읍을 중국 동남부의 남경에 정했으며 죽은 후 황위를 그의 장손에게 물려주었는데,주원장의 네번째 아들인 주체(朱棣)는 황위를 쟁탈하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으며 나중에 황제로 되었습니다. 남경이 함락된 후 주원장의 장손이 행방을 잃었으며 지금까지 명나라 역사에 남은 현안으로 되었으나,주체는 즉위한 후 남경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도읍을 북경에 옮겼습니다.
 
주체는 재위기간 사람을 파견하여 릉침을 선택하였는데, 선별을 거쳐 마침내 베이징 서북쪽에 있는 풍경이 아름답고 방어하기는 쉬우나 공격하기 어려운 곳을 자기의 릉침으로 선택했으며 이름을 장릉이라고 명했습니다. 기원 1409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200여년 동안 건설하였으며 선후로 13명 황제가 이곳에 매장 되여  명나라 황제의 릉묘군을 이루었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명 13릉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장손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 실수한 것이 바로 공신들을 죽인 것인데요. 후에 영리한 공신들이 나라에 정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미리 처단하였는데, 이는 후에 장손에게 왕위를 물려 줄때 장손을 지켜주고, 또 그가 의지할 공신이 없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 장손은  삼촌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 입니다. 때문에 행방불명된 장손의 무덤은 명13릉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릉이 각각 하나의 산에 조성되어 있고, 13개의 릉이 내부의 비밀통로를 통해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명대는 도합 14명의 황제가 통치를 했는데, 경태제를 제외한 모든 역대 황제들은 성조(영락제)릉의 주위에 안치되었습니다. 13릉의 크기는 서로 다르며, 제위를 지낸 기간과 태평성대를 이룬 황제는 자신의 통치기간 중 릉의 건축에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았고, 항상 직접 공사현장에 와서 시찰을 하면서 수정을 하였으므로 릉의 규모도 크고 건축물도 호화스럽게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13릉의 건설에 도대체 얼마의 사람을 동원하였는지는 아마도 통계가 어렵습니다. 릉안에 건설된 전각에 쓰인 목재를 보더라도 놀랄 정도인데요. 궁전, 능묘를 건설하기 위해 쓴 목재는 "황목(皇木)"이라고 하는데, 이 목재는 인적이 별로 없고 범과 승냥이가 나타나는 협곡에서 성장하므로 이를 찾고 채벌하려면 반드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황목을 얻는 데는 아마 수많은 인명사고가 있었을 것이며, 때문에 황목이 자라는 사천성에는 入山一千, 出山五百("일천명이 산에 들어가면 오백명만 살아나온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 황목은 대대적으로 채벌한 후에도 운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직 우기에 홍수가 나서 산 중턱까지 물이 차면 목재를 산에서 물에 띄워 강에까지 운반한 후 북경으로 옮기곤 했습니다. 여기서 뗏목 하나를 북경까지 운반하려면 적어도 5-6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답니다. 정말 기가 막히죠?.
13릉의 크기는 서로 다르며, 제위를 지낸 기간과 태평성대를 이룬 황제는 자신의 통치기간 중 릉의 건축에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았고, 항상 직접 공사현장에 와서 시찰을 하면서 수정을 하였으므로 릉의 규모도 크고 건축물도 호화스럽게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능구의 남단에 있는 석패방(石牌坊)은 능구에 들어서는 첫 건축물로서 명나라 가정 19년(기원 1540년)에 건조하였습니다.높이 14m, 너비 28.86m, 5문 6주 11루로 중국에서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는 제일 오랜 석패방입니다. 대홍문이라고도 부르는 대궁문은 능구의 정문으로서 처음엔 궁문 양측에 40km되는 담장이 있었습니다. 문 밖 동서 양측에는 말에서 내리는 하마비가 있는데 비석에는 "이곳에서 관원 등 사람들은 말에서 내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대홍문에 들어가기 전 멀지 않은 곳에 비루가 있는데 이  안에는 높이 6m나 되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대명장릉신 공성덕비"라고 쓰여 있습니다.
명 13능을 들어가는 참배 길이라 할 수 있는 신도(禪路)는 제왕 생전의 의장대로서 총 길이는 750m,양쪽에는 공신, 문관, 무관이 각각 4개씩 12개가 있습니다. 이 돌로 만든 사람 뒤에는 말, 기린, 코끼리, 낙타, 사자 등의 석상이 있는데 이는 문무백관들이 일년 내내 밤낮으로 제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며 황조의 공고성을 과시하려는 뜻에서 세운 것 입니다. 영성문은 한편 용봉문이라고도 하는데 신도 북단에 있는 한백옥석으로 된 패방으로, 이 문에 들어서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릉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장릉(長陵)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릉인데 이 릉은 명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3대 황제인 영락제(成祖)가 묻혀있는 곳으로13릉 중 처음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405년에 착공되어 지하궁전 4년, 지상의 주요 건물 완성에 1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장릉은 13릉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합니다.
 
지하에는 진시황릉과 같은 지하무덤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발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영락제는  조선시대의 태종대왕과 세조대왕과 비슷한 인생을 산 인물인데 골육상잔 끝에 왕위를 찬탈하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황제인데요.영락제는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고 지금의 자금성을 축조한 황제입니다.
지하궁전 내에는 도합 7개의 거대한 돌문이 있으며 문과 지하동굴은 모두 한백옥석(漢白玉石)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지하궁에는 모두 다섯 개의 궁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기둥과 대들보가 없는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지하궁에는 관곽 외에 금, 은, 진주, 보석, 옥기 등 많은 순장품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만력황제의 금관이 있는데 조각은 머리카락 굵기의 황금실로 정교히 만들어져 있습니다. 금관 위에는 두 개의 금룡문양이 박혀 있어서 당시의 높은 공예기술 수준을 보여줍니다
지하궁전은 땅 밑으로 27m깊이에 1,195㎢의 면적의 완전한 석조구조로 주요하게 전, 중, 후 삼전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전전(前殿)은 사무구역이고 중전(中殿)은 후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침실이며 후전(後殿)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로서 명13대 황제 주익균과 효단, 효정 두 황후의 관재가 놓여져 있습니다. 옛날의 황제들은 본래 한 황후만을 자기 옆에 묻어야만 했지만 만력제는 황후 둘을 자기 옆에 두었다고 합니다.
만력제라는 인물은 2세의 어린 나이에 황위를 이어받아 무려 48년간 재위하는 등 명대 어느 황제보다도 제위기간은 길었지만,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주색에만 몰두했던 대명 제국 쇠락의 주인공입니다.
명13능은 당시 황제들이 만 19세만 되면 자기의 무덤을 선택하고 건설해야 했는데 정능의 주익균은 22살부터 28살까지 지하궁전을 만들었으며 건설하는데 백은 800만냥(2년치 국가 예산에 해당)이나 소모했다고
하네요. 당시 주익균은 자기의 능묘를 지은 후 황후와 왕비, 대신들을 데리고 자기의 수궁 내에서 큰 연회를 벌려놓고 마음껏 마시면서 즐겼다고 합니다.
 
또한 그가 죽은 후 관을 남한테 도적을 맞지 안는 방안으로 능묘를 아주 견고하게 건축하였고 묻힌 후 매우 엄밀히 봉해 놓았다고 합니다. 몇 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방대한 13능의 지하 건축은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북경명황궁(北京明皇宫)

명13릉의 입구와는 2Km 정도 떨어져 있는  북경명황궁(北京明皇宫)은 납상관으로 '납상(蜡像)'은 밀랍인형을 의미합니다. 내부에는 밀납 인형과 장식으로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 때부터 16대왕까지의 주요 역사적 사건과 일화 등을 소개하는 총 15개의 전시관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매 전사관을 통과할 때마다 홍색 버튼을 누르면 중국어 등으로 설명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명 13릉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명나라 황제 가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자 한다면 한번 들러 볼만 한 곳인것 같습니다^^
명 13릉에 묻히지 않은 왕과 그 이유는?
영락제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남경이 명나라의 수도였던 관계로 1대 홍무제(주원장)는 남경 자금산의 명효릉에 묻혀 있으며, 2대 건문제는 연왕 주체(영락제)가 난을 일으킨 후 실종되어서 생사를 알 수 없었으며, 7대 경태제는 금산에 있습니다. 정통제가 천순제로 복위하면서 정통성을 문제 삼아 다른 곳에 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원문보기 : http://www.bj8282.com
원문보기 : http://cafe.daum.net/bj8282-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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